한국 민화의 중시조,
조자용의 생애와 발자취

윤열수

민화 위해 바친 땀과 열정의 생애

“드디어 해냈다. 꿈에 그리던 일천평 대 전시장에서 전시를 해냈다.!!”
1999년 세밑 어느 날, 대전 엑스포 무역전시장을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흥분되고 호탕한 음성이 아직도 귀에 들려오는 듯 생생하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왕도깨비와, 용, 호랑이 등 우리 전통 민화의 주인공들을 보란 듯이 커다란 전시실에서 전시하게 된 감회가 그렇듯 크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의 전시회를 그토록 기뻐한 호탕한 음성의 주인공은 우리 기층 문화의 세계를 탐구하고 알리는 데 묵묵히 헌신해온 선각자 조자용 선생이었다. 당시 그를 그렇게 감동시켰던 전시회는 대전 엑스프 무역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던 ‘어린이를 위한 왕도깨비 용 호랑이 전’으로 무려 11,000평의 운동장 같이 큰 전시장에 도깨비, 용, 호랑이, 거북, 봉황 등 다섯 가지 영물을 한데 묶어 45일간에 걸쳐 선보인 매머드급 전시회였다. 이 큰 전시회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성사시키고 준비해온 그로서는 그 전시가 그간의 고독한 노력에 대한 값진 보상으로 여겨질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시샘이었을까? 75세의 고령을 잊은 채 전시 준비에 몰두해온 나머지 오랜 지병에 과로가 겹쳐 그렇게 자랑스러워했고 의기양양해 했던 전시장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 기층 문화, 특히 민화에 대한 가없는 애정과 열정으로 우리 민화 연구의 기초를 닦은 거목이 그렇게 눈을 감은 것이었다. 향년 75세. 때는 전시의 종료를 눈 앞에 둔 새천년 1월 29일의 일이었다.
조자용은 건축가, 학자, 혹은 문화운동가 등 어떤 한 가지 호칭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큰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선각자, 큰 스승, 두령(頭領) 등 존경과 경외심이 담긴 호칭에서 괴짜, 도깨비, 큰 무당, 호레이 같은 정감 넘치는 애칭까지, 실로 다양한 별칭과 호칭이 그의 폭넓고 열정적인 삶을 짐작케 해 준다.


대갈 조자용

유능한 건축가에서 민화연구가로

조자용은 1926년 황해도 해주 황주군 점교면 쟁수리 757번지에서 아버지 조성일(趙聖一)과 어머니 김종실(金鍾實)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평양사법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 웨슬리안 칼리지(Wesleyan College)를 거쳐 반더빌트 (Vanderbilt) 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명문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을 전공하고 1953년 졸업했다. 일찌감치 선구적인 건축가로서의 삶이 예약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957년 귀국한 그는 전후(戰後)의 황량한 터전 위에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을 지으며 건축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미국대사관저, 그래험 기념 병원, 전주 예수 병원, 대구 제중병원, 부산 구세군 본부 빌딩, YMCA 건물, 정동 미국 대사관 관저 등 지금도 선구적인 서양식 건축물로 기억되고 있는 건물들이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유산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부터 그의 열정적인 시선이 한국 민중의 땀 냄새 어린 기층문화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우리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자신이 배운 서양의 건축에 우리 옛 건축의 아름다운 선과 구조를 접목, 절충 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우리 전통 문화 중 특히 기교로 가공되지 않은 투박하고 소박하며 정겨운 기층문화의 멋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 건축 자료를 하나하나 수집해 가던 그는 이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 내에 건축사 자료실을 만들었다. 그의 컬렉션은 이후 전통 건축을 넘어 기층문화 전반으로 지평을 넓히면서 조금 후에 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 민화(民畵)에 까지 이르렀다. 특히 민화에 대한 수집열은 가히 벽(癖)라 할 만큼 과도하다 싶은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열정과 노력은 마침내 1968년 사립 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의 개관으로 뜻깊은 결실을 맺는다. 서울 외곽의 허허벌판이었던 현재의 강서구 등촌동에 210평의 규모로 문을 연 에밀레박물관은 기층 예술의 정수인 민화를 수장하고 전시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화 전문 박물관이었다. 민화는 근대 이후 ‘잡된 그림’․‘속된 그림’․‘별난 그림’ 등으로 불리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거나 심지어 천시되던 그림이었다. 고작해야 이름도 실력도 없는 떠돌이 환쟁이가 그린 허접스런 그림을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민화만을 수집, 전시하기 위한 전문박물관을 개관한다는 것은 보통의 집념과 열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돌출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탄생된 에밀레박물관은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 민화 연구의 모태이자 요람과도 같은 공간이 되었다. 조자용은 이곳을 근거로 민화의 수집과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해간다. 1970년에는 기층문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학회인 민학회를 창립하고, 1973년에는 기층문화 관련 박물관들의 모임인 한국민중박물관회를 창립,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그의 활동은 이제 단순한 수집과 연구를 넘어 기층문화를 우리 문화예술사의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한 ‘문화 운동’의 차원으로 발전한다.
이 무렵의 조자룡은 이미 유능한 건축가라기보다는 민화라는 괴벽(怪癖)에 걸려 일상생활의 전부가 온통 민화인 광적인 민화수집가이자 민화연구자였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는 도깨비, 심지어 민화에 미친 미치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민화의 체계화와 세계화를 위한 노력

이후 조자용은 민화, 그 중에서도 특히 ‘호랑이 민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민족문화관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펼쳐갔다. 그는 기층문화를 ‘민문화(民文化)’라는 용어로 명명하고 한국의 민문화를 ‘호랑이 문화’, ‘도깨비 문화’, ‘거북이 문화’, ‘수탉 문화’ 등 상징적 별명으로 분류하며 그 특성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도에 발간된 저서 는 이러한 작업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과 같은 저작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민문화론을 강좌와 저술 등을 통해 체계화해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에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76부터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던 1982년 까지 7년 동안 호랑이 민화를 주축으로 한 우리 민화의 해외 순회 전시를 계속했고 하와이 대학을 비롯, 유타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 워싱턴 대학 등에서 우리 민화에 대한 특강을 열기도 했다. 또한 출판을 통해 우리 민화의 세계를 알리는 데도 열성적이었다. (에밀레 미술관, 1976), 일본에서 펴낸 (講錟社, 1973) (講錟社, 1992) 등이 우리 민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연구및 저술활동과 함께 민문화의 정수를 보다 더 깊숙이 우리 사회에 소개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에 나선다. 우리의 민문화는 삶, 얼, 멋이 어우러져 이루진다고 정의하고, 이러한 민문화의 세계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민족문화수련캠프’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주관한 마지막 전시회인 1999년의 ‘왕도깨비, 용, 호랑이’ 전은 민화를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을 드넓은 대규모 전시장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마음껏 펼쳐 보이겠다는 그의 오랜 숙원이 결실을 본 뜻 깊은 이벤트였다.


1993년 속리산 에밀레박물관에서 벌어진 마을축제 때 도깨비로 분장한 조자용 선생

한국 민화 연구의 중시조로 길이 남다

짧은 한국 민화 연구사에서 조자용 선생이 차지하는 위상은 한마디로 “우리 민화의 중시조(中始祖)’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겠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 민화를 미학적, 혹은 학술적 관점에서 처음 주목하고 조명한 사람은 일본인 미술사가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1889-1961)이다. 그는 1929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민예품 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민화에 대한 언급은 1959년 8월 지에 그가 기고한 《불가사의한 조선 민화》와 저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우리 민화의 범주와 특징을 “창의성 보다 실용성이 강조되고, 몇 장씩 되풀이해서 그리는 그림이며 생활 공간의 장식을 주 목적으로 하는 민속적인 미와 상징성을 지니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야나기에 의해 조명된 우리 민화는 그 이후 정작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서는 오랫동안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조자용은 야나기 이후 우리 민화를 처음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고 일반에 널리 알림으로써 우리 민화에 대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체계적인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자, 기층문화의 모태(母胎)인 민화를 민족의 정체성을 읽어내는 단서, 즉 ‘민문화(民文化)의 열쇠’로 보고 이를 한국인의 마음의 눈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열정적인 민화 수집과 다양하고 활발한 전시를 통해 민화의 미와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한편, 방대한 민화의 종류를 체계적으로 분류, 후학들에 의한 학문적 연구의 기틀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회화 전체를 ‘한화(韓畵)’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크게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분류한 뒤, 민화는 실용회화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실용회화, 즉 민화를 상징별로 수(壽)․쌍희(雙囍)․자복(子福)․재복(財福)․영복(寧福)․녹복(祿福)․덕복(德福)․길상(吉相)․벽사(辟邪)․민족(民族) 등 열 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畵題)별로 나누어 산수화․수석도․소과도(蔬果圖)․화조도․축수도(祝壽圖)․영수화(靈獸畵)․어해도․초충도․옥우화(屋宇畵)․기용화(器用畵)․인물화․풍속화․도석화(道釋畵)․기록화․설화화․도안화․지도화․혼성도(混成圖)․춘화도(春畵圖)의 20가지로 분류했다. 물론 연구자에 따라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민화의 종류를 화제에 따라 분류한 조자용의 이 세밀한 분류는 현재까지도 민화 연구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이 되고 있다.
민화의 수집과 정리를 통해 학문적 연구의 기초를 닦은 일 이외에도 그는 자신이 발견한 민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전시, 강연, 책 공연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일반에게 알리고 이해시키는 데 헌신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열정적인 문화운동가이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저서 이외에 그가 펴낸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밀레미술관, 1970) (브리태니카, 1972) (에밀레 미술관, 1975) (에밀레미술관, 1975)(브리태니카, 1972) (에밀레 미술관, 1971) , (에밀레 미술관, 1973) (에밀레 미술관, 1974) (에밀레 미술관, 1975) (가나아트, 1975) (삼신학회 프레스, 1996) (삼신학회프레스, 1997) (삼신학회 프레스, 1998) (대전엑스포무역전시도록, 2000)
이처럼 전후(戰後)의 어수선하고 궁핍했던 시절을 가까스로 지나 개발의 구호 속에서 자칫 ‘진정한 우리의 것’이 잊혀지고 사라질지도 모를 위기의 시대에 ‘민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일깨워준 그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땅에 이렇듯 많고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민화가 이만큼이나마 학문적 연구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일반에게 사랑 받는 전통 예술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선구적인 혜안과 노력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바치는 ‘한국 민화의 중시조’라는 헌사獻辭는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다.


대갈 조자용 추모비

타계他界 이후-기념비에 새긴 발자취

그는 2001년 1월 30일 향년 75세로 타계해, 영산 속리산 천왕봉이 우러러 보이는 대목리 산기슭, 여삼신석 곁에 고이 잠들었다. 그리고 그가 타계한지 10년이 되는 지난 2010년 10월 10일, 그를 사랑하는 후학들과 지인들이 정성을 모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조촐한 추모비(大葛 趙子庸 先生 追慕碑)를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시인 홍강리의 추모시와 후학들이 바치는 추모사가 운곡 김동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추모사 大葛 趙子庸 先生 追慕碑
한강토 큰 인물로 황주 땅에 태어나
매 빛 꿈을 이뤄 하버드서 학위 받고
선얼 기리고자 민화 세상 섭렵하며
강불식 연마하여 건축사 새로 쓰니
솟는 그 기세가 온 누리에 가득 차매
생께서 남긴 업적 후세에 빛이 될 터
전에 못 다 이루신 청사진 가슴 품고
덕 찬사 뒤로 한 채 천왕봉 신선됐네.
뒷면 추모사 모름지기 한 민족의 문화는 그 민족이 보존해온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보존해 온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외래문화나 지배층의 그것이었을 뿐, 정작 소중하게 지켜야 할 민족문화나 기층문화는 오랫동안 소외되고 심지어 천시당한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암울한 시기에 민족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찾고 들춰내어 그 빼어남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긍지를 심어주신 큰 스승이 계셨으니 그가 바로 호레이 조자용 선생이시다. 선생이 아니었던들 단군 이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족문화의 정수를 어찌 우리가 다시금 북돋울 수 있었을 것인가.
1926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뛰어난 구조공학자이자 건축가였다. 21살 되던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공대와 하버드대학원을 졸업하고 1957년 귀국하여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 땅에 대학교, 종합병원 등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서울 정동에 한옥으로 지은 미국대사관저, 종로2가 YMCA 빌딩, 부산 구세군 본영 등이 건축가로서 선생의 혼이 담긴 걸작들이다.
그러나 석굴암, 다보탑 등에 구현된 우리 옛 건축의 아름다운 선과 구조를 현대 건축에 불러들여 되살리는 작업을 하던 중 선생은 한국의 기층문화와 민중 속에 스며 있는 한국문화의 원형과 같은 ‘우리 문화의 모태’의 정겨움과 소중함에 새롭게 눈 뜨게 된다. 이후 선생의 삶은 우리 기층문화에 담긴 민족 혼의 정수를 찾고 밝히고 널리 알리는데 오롯이 바쳐졌다. 긴 세월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옛 기왓장이며, 옹기며 민화 등을 수집, 분류하고 연구했다. 특히 민족 미술의 도도한 줄기로서 민화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민중 미술의 꽃으로 민화 연구의 든든한 초석을 놓은 것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의 빛나는 업적이다.
선생은 세심한 학자일뿐더러 민족 문화의 열정적인 전도사이기도 했다. 1970년 개관한 에밀레박물관은 우리나라 사립 박물관의 반석이 되어 기층문화 연구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은 한국민중박물관협회는 오늘날 (사)한국박물관협회의 시초가 되었다.
1970년대 문화계에 큰 화두를 던진 民學운동을 비롯, 개천절 국중 대회, 마을 신단의 재건, 곳곳에 장승을 세우는 일, 잃어버린 마을축제의 재현, 三神祠 겨레 문화 수련장 운영 등 수많은 문화운동들은 전적으로 그의 아름다운 열정과 집념이 이룬 결실이었다.
이렇듯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2000년 1월 30일, 대전엑스포 대형 전시장에서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위해 호랑이·도깨비 전시회를 개최하던 중 과로로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선생은 비록 가셨지만, 그가 고독하게 뿌린 씨앗은 어느새 단단히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가 품었던 나라 사랑과 민족문화 사랑의 정신은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활발한 연구의 동력이 되고 있다. 실로 선생이 이 땅에 살았기에 우리는 한국인임을 더욱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조자용 선생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하는 후학들은 이 조촐한 비를 세워 선생의 고귀한 집념과 열정이 민족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천십년 시월 십일, 후학 일동.